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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예술의 향연 구스타프 클림트

by 꽃범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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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삶은 어땠을까?

1862년 오스트리아의 빈 근교 바움가르텐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 판화가였지만 성공한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습니다.

1876년 클림트의 나이 14세에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하고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작품 등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빈에 새로 지어진 국립극장과 미술사박물관의 장식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892년 클림트는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인하여 정신적인 동요를 겪으며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 프랑스에 비해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의 보수적인 경향과 사상에 반발하게 된 클림트는 1897년 빈 분리주의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분리주의가 처음 나왔을 당시 빈의 미술계에서는 비난을 했지만, 그들은 <베르 사크룸>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배포하고 전시관 ‘제체시온’을 빈 한복판에 세우는 등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시회를 열었고 클림트는 이 전시회에서 <팔라스 아테나>를 출품합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클림트는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 장식화를 의뢰받고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의 주요 학문이었던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는데, 기존 공공작품과는 다른 화풍으로 엄청난 악평을 받게 됩니다. 결국 빈에서 큰 논란을 일으킨 그의 그림들은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철학’은 금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이라 낙인찍히고 압류당하고 불타버리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불행 중 다행으로 작품을 사진으로 남겨둔 것이 있어 흑백 사진으로나마 감상할 수 있습니다.

클림트는 1905년 빈 분리주의에서 탈퇴하고 그의 ‘황금시대’를 열게 됩니다. 화려한 장식적인 패턴, 찬란한 황금빛, 관능적인 여성을 사용하여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렇게 그의 명작 <키스>, <다나에> 등을 남기게 됩니다.

그 후 1918년 그의 나이 56세에 스페인 독감, 뇌경색과 폐렴 등 일련의 합병증으로 오스트리아 빈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림트의 작품 엿보기

<팔라스 아테나>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 여신의 모습을 클림트만의 표현법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평소 우리가 신화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된 아테나 여신이 아닌 황금 갑옷을 입고, 황금 투구를 쓴 채로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부터 클림트는 황금시대를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작품의 여신의 오른손에는 여자의 누드가 들려있습니다. 이는 승리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키스>

우리가 ‘클림트’의 이름을 들으면 떠올리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의 삶과 예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황금빛으로 표현한 작품이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과는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지 못해서 인지 사랑에 대한 갈망이 더 절실하게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클림트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금이 가장 많이 쓰인 작품입니다. 남편의 의뢰로 그려지게 된 이 작품은 의뢰 후 4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클림트의 공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빈에서 미국으로 가게 된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는데 이는 영화 <우먼 인 골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 경매가 1,500억원의 작품 <우먼 인 골드>

2015년 개봉한 이 영화는 클림트의 명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과 관련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유대인 집안이었던 아델레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그림을 몰수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델레 부인의 조카였던 마리아 알트만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노인이 된 그녀는 젊은 시절 추억이 담긴 클림트의 그림들을 되찾고자 오스트리아라는 국가를 상대로 약 8년간의 긴 소송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그림을 환원받게 되는 결말입니다.

작품을 환원받은 마리아 알트만은 에스티 로더 창업자의 아들인 로날드 로더에게 2006년 당시 약 1500억원으로 되팔면서  "작품은 항상 공공에 전시되어야 한다" 조건을 달았고 현재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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