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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

by 꽃범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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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의 삶을 알아보고 그의 작품, 그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천재성

1475년 3월 6일,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처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루도비코는 작은 읍의 행정관이었습니다. 부오나로티 가문은 귀족가문이었지만 재정적으로 몰락하여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유모는 석공의 아내여서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대리석, 조각 등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쇠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길 기대하며 그에 걸맞는 직업을 갖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그림 그리는 것에만 흥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귀족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손찌검을 하는 등으로 아들을 훈육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집 있던 미켈란젤로는 아버지를 이기고 미술의 길을 걷게 됩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나이 13세 때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3년간 견습생으로 일하기로 하고 그의 밑에서 일을 배웠지만 스승과의 불화로 일 년 정도만 배우고 그 작업실을 나오게 됩니다. 그는 회화보다는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을 하고 싶었고, 1489년 그의 나이 14세 때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서 가르치던 조각 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곳에서 피렌체의 군주였던 로렌초의 눈에 들게 되었고, 예술 애호가였던 로렌초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뛰어난 학자와 미술 수집품을 보고 읽어내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품활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 로마에 가게 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라는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24세의 나이에 완성한 걸작이자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며 오늘날까지도 르네상스 시대 조각품을 대표하는 명작이 되었습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다비드> 상이라는 또 다른 명작을 완성하였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천재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이유

<피에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무는 동안 의뢰받아 만들어진 걸작 <피에타>는 프랑스의 추기경 장 빌레르의 주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리스도를 무릎에 눕혀 놓은 모습을 조각한 이 조각품을 위해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을 채석장에서 로마까지 9개월 동안 옮겨오는데 동행했다고 합니다. 이 조각품은 마리아의 슬프지만 아름다움,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옷의 주름 역시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성모마리아의 얼굴이 너무 어리다고 하지만 이는 성모마리아가 늙음이라는 죄를 받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무릎 위의 그리스도의 몸이 성모마리아 비해 너무 작은 비율로 조각되어 있어 어린아이 정도라고 볼 수 도 있는데 신이 보는 관점이 위에서 이 조각품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다고 하니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비드>

우리에게 다비드 상으로 잘 알려진 이 조각품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와 제작한 작품입니다. 26세의 미켈란젤로는 40여 년간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대리석으로 다비드 상, 즉 다윗의 입상을 주문받아 제작한 것입니다. 이는 압제에 대한 피렌체 공화국의 승리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에 조각하는 것을 그 안에 이미 작품이 있고, 자신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4미터가 넘는 이 크기의 조각품은 정면에서 보면 머리가 유독 크게 보여 비율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천재 미켈란젤로가 사람들이 아래에서 볼 것을 미리 예상하고 밑에서 봤을 때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비율로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지창조>

회화를 경멸하던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됩니다. 회화가 전문분야가 아니였기에 당연히 거절했고 당시 라이벌 관계로 놓인 라파엘로를 추천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그는 제작에 들어갑니다. 약 200평 이상의 면적, 높이 20m의 천장에 매달려서 1508년부터 1512년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켈란젤로는 목을 꺾고, 눈에 물감이 들어가는 고통을 인내하며 작품을 완성합니다. 원래 미켈란젤로는 12 사도의 그림을 계획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천지창조라는 걸작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천장화는 미켈란젤로가 회화 화가가 아닌 조각가였기 때문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구성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

약 22년 후 그는 다시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1536년부터 1541년까지 교황 바오로 3세의 명령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시스티나 성당의 입구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서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그에게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교황청의 비아조 다 체세나 추기경은 작품의 인물들이 나체로 그려진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당시의 인물들의 얼굴로 작품을 채워 나갔는데 비아조의 얼굴을 지옥의 왕인 미노스에 대입하여 그렸습니다. 비아조는 미켈란젤로에게 직접 찾아가서 자신의 모습을 바꿔달라고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더 끔찍하게 그렸다고 대꾸하여 비아조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최후의 심판>은 나체로 표현된 것이 계속 문제 삼아졌고 결국 미켈란젤로의 사망 후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다니엘레 다볼테라가 중요 부분에 천을 덧대어 그리는 식으로 수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근대에 와서야 최후의 심판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천지창조를 담은 영화 아거니 앤 엑스터시

1965년 개봉된 영화로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리는 동안 교황 율리우스 2세와의 대립과 갈등을 엿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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